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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보내주지 않아도 수요는 공급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류구의 존재가 중국과 일본에 알려지는 7세기경이 갈림길이었다.류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배경의 중국 때문이었고.
중국 직항이 가능한 선박과 항해술이 확보될 때까지 류구 항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nesia는 폴리네시아·인도네시아 등 용례에서 ‘섬만이 아니라 섬들을 둘러싼 바다까지 포괄하는 뜻이다.많은 중국인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선진기술을 전파하며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702~752년에는 류구 항로를 이용하다가 773~838년에는 규슈 연안에서 닝보(寧波) 방면으로 곧장 건너가는 항로로 바뀌었다.제주도보다 작은 섬이 북산·중산·남산으로 쪼개져 있었다니 제주도의 삼성혈(三姓穴)이 떠오른다.
덩치 큰 타이완보다 먼저 알려져 백제 멸망 후 중·일 항로로 부각 15세기 해상 요충지에 류구왕국 바다 건너온 중국인이 지배계층 ‘메이지유신 일본.
일반인은 구메무라 주민을 중국인의 후예로 여겼다.이 이중성을 중국에서는 끝내 알아채지 못했을까.
『수서(隋書)』(636)에 나오는 ‘류구(流求)란 이름이 타이완을 가리킨 것으로 보기도 한다.해양문명인 남양문명이 대륙문명에 밀려난 결과다.
[사진 위키피디아] 류구는 두 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260여 년을 지내게 되었다.7~8세기에 강했던 육지세력의 압력이 9~10세기에 줄어들면서 해상세력의 힘이 해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